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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열흘 후면 한글날입니다. 올해는 또 금요일이니 황금 연휴.. 추석 연휴를 잘 보내고 또 쉬게 되었습니다.

이럴때 고궁이나 왕릉, 기념관 등 많이 찾을 것 같아요. 물론 산으로 들로 나가 활동하시는 분들도 많이 있겠죠.. 그 곳에도 우리 유적들이 많으니 두루두루 간 김에 들러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몇 년전 청령포에 갔다가 큰 감흥을 받은 것처럼...

 

전국의 왕릉

 

 

전 평소에도 조선왕조 얘기를 재미있어 합니다. 유일하게 보는 TV 프로가 '역사 저널 그날'이에요.. 역사저널 그날에 박시백씨의 "조선왕조실록"이 자주 인용되어 나옵니다. 남편이 얘기하길 역사 만화로 유명하다고 하더라구요. 다른 것보다 사실 위주이고 그림도 잘 그린다고요..^^ 그래서 저도 요즘 이 만화를 봅니다. 만화라기 보다는 간결하게 요약 정리된 실록 해설서 같아요. 군데군데 재미있는 곳도 있는데... 전 경종 부분과 태종 단종 부분을 감명깊게 읽었어요. 대부분의 얘기는 이미 다 알고 있는 사건들이지만 이렇게 연결해서 쭈~욱 보니 원인과 결과가 잘 이해가 되고 복잡했던 종친, 대신, 공신간의 관계도 쉽게 받아들여지는 것 같아요. 조선사에 관심있는 분은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집근처에 이런 책을 빌릴 수 있는 공공 도서관이 생겨서 너무 좋아요..^^ 아래 내용들은 대부분 이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참고해 작성한 것입니다.

 

 

백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세종 편을 다시 읽다가... 문득 세종의 업적을 블로그에 남기고 싶어 졌어요.

책을 찬찬히 읽어보니 이제까지 세종의 업적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문종이나 세조 기타 많은 학자들의 것인 경우도 많았어요. 단순히 시험답으로 외우며 국사를 배운 탓이겠죠.. 또 신하의 업적은 그 왕의 업적이기도 하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종의 업적은 보고 보고 또 봐도 경이롭기만 합니다. 신하에게 무언가를 명하기에 앞어 본인이 먼저 찾아보고 생각하고 방향을 정해주고, 신하의 결과물은 꼼꼼히 살펴 교정하고 다시 확인하고, 또 본인의 지식이 이미 완전하기에 스스로 이룩한 업적 또한 놀랍기 그지 없고... 정말로 임금 중의 임금, 천세에 날까말까한 대왕이라고 생각됩니다.

 

태종이 세자를 양녕에서 충녕으로 바꾼지 두어달만에 충녕은 왕이 되었다고 해요. 양녕은 세자로 14년을 있었는데요..ㅜ 태종의 나이도 50대에 아직 건강하고 스스로 왕이 되겠다며 동생들까지 다 죽여놓고 참 희안도 하다.. 생각했었는데.. 아마도 그만큼 세종이 뛰어나니 밀려난 양녕도 또 스스로 내어준 태종도 어쩔 수 없이 된 일이 아니었나 생각되요. 저 완벽한 천재를 빨리 왕으로 만들기 위해 물러나 주는 거죠. 그만큼 태종네 집안은 가족 관계가 좋았으니까요... 그리하여 상왕이 셋이라니...ㅋㅋㅋ 태조태종세종세조 이 4대의 얘기는 너무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는 것 같아요..ㅎ 이 4대 안에 태정태세문단세... 왕이 일곱이나 있다니.. 대단해요..ㅎㅎ

 

 

세종의 업적

세종의 업적도 되겠지만 세종 시대의 업적으로 생각하고 씁니다. 그만큼 재능있는 인재도 많았고, 단독으로 하기보다 왕과 여러 인재들이 모여 만든경우가 대부분이니까요.

 

1. 집현전과 학자

집현전은 그 전부터 있었으나 세종 때 궁 안에 설치(경복궁 수정전 자리)되서 젊디 젊은 똑똑한 학자들로 채워졌다고 해요. 32명까지도 있었다는데 세종때는 정치에는 관여치 않고 상고 연구 공부만 하는 일을 했나봐요. 그도 그럴것이 신진의 어린 학자이었으니까요. 후에 사육신과 신숙주 정인지 등 모두 중요 직책을 맡게 되지만 세종 때 집현전에선 주로 임금의 결정에 도움을 주는 학문 연구나 자문, 경연/서연, 서적 편찬 일을 했다고 합니다. 대표적인 저술로는 무려 32-3년에 걸쳐 수정되어 완성된 고려사, 농사직설, 오례의, 팔도지리지, 삼강행실, 치평요람, 동국정운, 용비어천가,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의방유취 등의 책이 있대요.

 

고려사

고려사는 세종 1년에 변계량에게 처음 수정이 맡겨져서 몇번에 걸쳐 다시 수정지시가 내려졌세종 31년에 정인지 김종서에게 명해 편찬한 고려사로 문종 1년에 완성되었다고 해요. 139권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을 말투나 보는 관점이 옳지 않다고 하여 그렇게 여러해 수정 편찬 하였다니.. 세종은 정말 꼼꼼하고 완벽한 성격인것 같습니다.

 

농사직설

참 우리 나라에서도 경기도 경상도 전라도가 풍토가 완전히 달라 경기도 쌀은 짤막하고 딴딴하고 전라도 쌀은 길죽하고 부드러운데 중국의 농사책을 참고해서 농사를 지었다면 제대로 되었을리 없죠.. 세종은 엊비슷한 정도도 그냥 보고 넘어가는 성미가 아니니 가장 시급하고 기본적인 것으로 식량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농사책이 꼭 필요했을 것으로 생각되요. '지역마다 풍토와 농법이 다르니 각 도의 나이든 농부들을 찾아 농법을 듣고 기록하라' 시켰고 그것을 책으로 편찬한 것이 집현전의 농업기술서 농사직설 이랍니다.

 

향약집성방과 의방유취

농사만 중국과 다른게 아니죠. 그러고보면 이때 대부분의 책이 중국의 책을 가져다 활용하고 인용하였나봐요. 그런 책들을 두루 섭렵한 애민 성군 세종이 의학 쪽에 관심이 없었을 리 없었을거에요. 우리 몸에 맞는 의학서로, 우리 산천에서 난 약재를 소개하는 '향약집성방'과 의학 백과사전 '의방유취'를 의원과 집현전 학자들이 공동으로 하여 편찬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자치통감 해설서

이 자치통감 해설서를 편찬하느라 집현전 학자가 32명으로 늘었을 정도였다고 하는데요. 중국의 자치통감 이라는 방대한 분량의 역사서로 이미 몇권의 중국 해설서가 있지만, 세종이 '역사를 공부하는데 자치통감 만큼 자세하고 중심잡힌 것이 없다'며 우리만의 독자적인 해설서 편찬을 지시했다고 해요. 저도 이 나이 되어보니.. 역사를 아는 것이 지금 난국을 헤쳐가고 앞으로의 비전을 구상해 보는데 많은 참고가 되더라구요..

 

삼강행실도

세종이 백성을 사랑하고 아끼다 보니... 백성이 글을 몰라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그래 백성을 가르쳐야 되겠다.. 생각했지만 백성은 한자를 모르니 가르칠 방법을 생각한게 그림이었는데요. 짧은 글과 그림을 섞어 군신/부자/부부(삼강) 간의 도리에 대해 모범이 될 사례(충신/효자/열녀)를 모아 만든 책이 삼강행실도 랍니다. 예는 중국과 우리나라의 것을 110가지 정도 골랐고, 그림은 안견등 당시 유명한 화원들이 참여해 그림만봐도 쉽게 이해가 되도록 생동감있게 그렸다고 하네요. 이 책은 나중에 성종...등 때 한글이 추가되서 다시 재판되었고, 일본에 수출도 되었다구요..^^ 판화 기술도 이미 대단했었나봐요. 이렇게 편찬해서 찍어낸 책을 백성들에게 널리 알리긴 햇지만, 일부 설명은 한문으로 되어 있고... 확실한 세종의 성격에 부족함이 있다 생각했겠죠? 우리글자 창제의지가 막 솓구쳤을 거에요..ㅎ

 

 

2. 인쇄술의 발전과 갑인자

세종은 이미 발간된 책도 여러권 인쇄하여 학자들에게 나눠주고 공부하게 시켰고, 또 과학 음악 수학 역사 도덕 의학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양의 저술과 출판을 주문 했는데, 그리해서 당연히 인쇄술이 엄청나게 발전하게 됐겠죠. 인쇄의 책임자는 '이천' 이었다고 해요. 수요가 많으니 당연히 더 예쁜 글자체로 더 빠르게 인쇄가 가능하길 주문했을 거에요. 그래서 세종 초에 벌써 글자 사이에 대나무 조각을 끼워넣어서 글자들이 움직이지 않게 하고 바르게 인쇄되는 갑인자가 만들어져 그 이전방법보다 속도가 20배나 빨라졌었대요. 이 갑인자는 조립이 편리하고 글자체가 굵고 아름답고 보기 편해 선조때까지 140년이나 재조 없이 그대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지금 봐도 아주 선명하고 눈에 쉽게 구분가는것이 컴퓨터 글꼴로 만들면 좋을 것 같아요..^^ 세종 초에 벌써 이런 일들을 마구마구 시작했으니 그 이전에 이미 여러가지 구상들이 머리에 떠올랐을 거에요. 공부만 하지 않고 연구하고 무언가 계속 바꾸고 발전시키려 하는 세종을 보고... 그 아버지와 형이 그 자리를 지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생각되었을 수도 있죠.. 양녕이 왕이되고 신하로써 이런 기술을 건의하고 발전시켰을 수도 있었겠지만... 생각보다 왕의 자리에 있는 기간은 길지 않습니다. 그 안에 신하의 위치에서 여러 제약을 받으며 맘껏 이 많은 것들을 해낼 수 없었을 거에요. 그런의미에서 태종과 양녕의 탁월한 선택은 지금 생각해도 소름끼치게 옳았다고 봅니다.

 

 

3. 우리 역법 칠정산 내/외편

세종 4년 1월 1일에 일식이 있어 임금과 백관이 모두 모여 구식례를 했는데 예보시각이 1각(15분)이나 틀렸다고 해서 예보관이 곤장을 맞았다고하죠.. 세종은 이것이 중국의 달력 역서를 쓰는 때문이란걸 알고 중국 몰래 우리 자체 역서를 만들어야 겠다 생각했는데요. 그러면 농사 절기도 우리식으로 맞고 아무래도 우린 중국의 한 변방이 아니니까요.. 하늘을 보는 역법이 우리만의 것이 있다는 것은 대단한 자부심이 될 거라 고무됐을 거 같아요..ㅎ 역법을 만드려면... 우선 하늘을 봐야 하고 하늘을 제대로 보려면 천문 관측 기구가 있어야 되겠죠.. 또 세밀한 별들의 움직임을 기록해 계산하는 천문, 수학 능력도 있어야 할 거에요. 유능한 학자들이야 집현전에 많으니... 정초 이순지 정인지 등이 수학에 능한 학자를 모아 역서를 연구해서 관측기구 등의 이론을 만들어주고, 이천 장영실 등은 그 자료로 관측기구를 만들었답니다. 이렇게 나온 관측기구들이 혼천의, 간의, 규표 같은 것인데요. 해/달/수/금/화/목/토성의 궤도와 주기도 밝혀지고 한양의 위도도 지금과 거의 일치할 정도로 알아냈다(이순지)고 해요. 칠정산 내편은 중국 역서를 연구해 만든 것이고, 칠정산 외편은 아라비아 역서를 연구해 만든 것이래요. 이 칠정산 내/외편은 훈민정음에 버금가도록 세종의 큰 업적이라고 생각되요. 세종실록의 별책부록으로 실렸을 정도래요..ㅎ

 

 

4. 해시계 앙부일구, 별시계 일정성시의, 물시계 자격루

천문 연구와 더불어 시계에 관한 연구도 함께 진행되었어요. 당연히 그렇겠죠? 여러 천문 도구들이 개발되며 시간을 보는 필요도 방법도 다양하게 연구되었을 거에요. 일정성시의는 천체 관측과 시계를 겸한 별을 활용한 시계이고, 앙부일구는 해의 움직임에 따라서 시각과 절기를 동시에 알려주는 달력 겸용 해시계였대요.. 대로에 설치해놓고 사람들이 지나가며 시간을 볼 수 있도록 했다네요..ㅎ 정말 친절한 발상이죠~ 또.. 장영실의 자격루는... 정말 엄청난 알람 물시계인데요. 물이 수수호로 들어가면 잣대를 밀어올려 구슬을 시보 장치로 보내 시간을 알려주는 알람 시계라고 합니다. 여러 단계마다 정확한 정도를 계산해야 됐었으니.. 장영실은 정말 천재였나봐요.. 자격루에서 시간을 알려주면 광화문 등에서 받아 북을 또 쳐줘서 사람들에게 크게 알려줬다고 합니다..^^

 

장영실이 만든 물시계 자격루(출처: 두산백과)

 

 

 

5. 문종과 장영실의 측우기

장영실은 측우기도 만들었는데요. 이건 문종의 아이디어를 기본으로 해서 만들었을지도 모른다고 해요. 세종이, '세자가 비가 오면 땅을 파서 땅이 비에 젖은 정도를 재다가, 후에는 구리 그릇을 만들어 놓고 빗물의 양을 자로 재곤 했다'고 한 기록이 있다고 하니까요.. 문종도 세종 만큼의 학식과 성품을 지녔고 또 세종을 지척에서 도왔으니 충분히 가능성 있는 얘기인것 같아요.

 

문종은 세자로 30년이나 있었다죠.. 그중 8년은 직접 정무를 처리했고 글씨도 잘쓰고 문장도 훌륭했으며 집안 내력인지 활쏘기도 잘했다고 해요. 또 천문을 잘 읽어서 세종에게 일기예보를 정확히 일러주기도 하고 역산과 음운학에도 도통했다니 그 아버지에 그아들이 딱인것 같아요..ㅎ 훈민정음을 만드는 과정도 아버지를 직접적으로 도왔다고 하는데... 참... 아이만 일찍일찍 잘 나아 주었더라면...ㅜ 운동으로 체력을 좀 단련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네요..ㅜ 아버지의 성품을 닮은 단종에게 보위를 안정적으로 물려줬다면.. 김종서나 사육신의 아까운 죽음도 없었을 것이고.. 훗날 남이의 죽음도 없었을 듯... 난 세조와 그 아들들이 싫답니다...ㅜㅜ;; 일기예보는 강에 새워 강물의 양을 재는 수표(중랑천 다리에도 표시되어 있죠..ㅎ), 깃발을 달아 바람의 방향을 보는 풍향계 등을 종합해서 내렸다고 합니다.

 

 

6. 악기와 아악보.. 박연

세종은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제대로 된 궁중 음악이 만들어지길 원했는데요. 실제로 자신이 직접 땅을 막대기로 두드려 곡을 만들기도 했대요. 용비어천가에 곡을 붙인 보태평/정대업 등은 종묘 제례악으로 오늘날까지 연주된다니 대단한것 같아요... 이 세종의 뜻을 받들어 악기(편경 등)를 직접 설계해 만들고, 우리음 12가지도 직접 만들고, 아악보 라는 책도 만들고 한 조선전기 궁중음악의 독보적인 인물이 박연이래요. 이 음악이라는 것도 크기와 양의 차이... 수학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ㅎ 세종 시대엔 이렇게 수학 과학 문학 분야에 아주 큰 성과들이 많은 것 같아요. 우리(고려) 전통 음악은 향악 이라고 한답니다. 편경을 만들어 시연하자 세종이 크게 만족하면서도 약간 다른 소리를 지적해 깜짝 놀라게 했다는 얘기도 있대요..^^

 

 

7. 무기의 발전과 여진정벌

세종 초기에 대마도 정벌이 있었죠.. 병권은 태종에게 여전히 있었으니 태종이 직접 명령하여 그후 100년간은 댐비지 못할 큰 성과를 거뒀었다는데요. 그 때의 감흥이 남달랐는지 홀로서기 한 세종도 무기 관련해서 많은 실적들을 만들어 냈다고 해요. 화약, 화포, 병선 등을 연구해 날로 발전 시켯고 그 든든한 성과로 야인정벌(최윤덕)에 나섯고 그 때 이미 화약, 화포의 능력이 중국이상이었기 때문에 쉽게 승리를 얻었다해요..ㅎ 요때 안잡힌 야인 적장 이만주는 세조가 명을 도와 생색만 내고 오라고 보낸 강순에게 어이없게 잡혀 죽었다고..ㅋ 하튼 세종 때 야인정벌이 성공하여 지금의 지도 모양에 4군 6진도 확실히 만들고(김종서), 사민 정책으로 농사를 지을 줄 아는 백성도 이주시키고... 했다고 합니다...

 

 

8. 훈민정음

훈민정음은 28개의 정음초성 중성 종성으로 합하여 만들고, 간단하며 전환이 무궁하다.. 이게 훈민정음... 계해년 겨울 우리 전하께서 새로이 만들어 예를 간단히 들어보시고 지은 이름 훈민정음...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에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이면 그 방법을 다 깨친다는 경이로운 글자 훈민정음... 참 우리는 이 천재 임금을 진작에 두어 오늘날 이런 글자를 누릴 수 있네요... 정말 행운이에요..^^ 말은 있으나 글이 없다... 상상을 할 수가 없어요. 내생각과 말을 어떤 기록으로 쉽게 남길 수 없다니... 말을 조리있게 못하는 나같은 사람은 정말 그 답답함이 원통하고 한이 없었을 것 같아요..ㅜ

 

임금이 비밀리에 단독으로 새로운 글자 28개를 만들었다.. 믿지 못할 일이긴 해도 세종은 원체 다방면에 도통하였고 배우고 만들길 즐겨했고 또 문종에게 일찍 정사를 넘겨줘 섭정하게 했고 갖은 병중에서도 책을 놓지않았으며 그에겐 어떤 학자보다 박식한 아들 딸들이 수두룩했죠.. 전 충분히 홀로 글자를 만들 능력과 조건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정인지가 지은 훈민정음 혜례본 서문에 정확히 표시되어 있는 근거도 있구요.. 그리고 집현전 학자 성삼문의 '해동잡기'라는 책에도 세종과 문종이 창제했다고 쓰여 있다고 해요.

 

훈민정음은 글자 28글자를 말하기도 하지만'훈민정음' 책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훈민정음은 '예의본'과 '해례본'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예의본은 세종이 직접쓴 것으로, 한글을 만든 이유와 글자의 사용법이 간단하게 설명(한문)되어 있고 세종 실록 등에도 실려 있습니다. 그리고 혜례본은 정인지와 성삼문/신숙주/박팽년/최항 등 집현전 학자들이 만든 것으로, 훈민정음의 자음 모음에 대한 설명과 합자되는 원리와 예, 정인지의 서문(소개) 등이 포함되어 입니다. 세종의 예의본을 한글로 "나랏말싸미"로 옮겨 놓은 것은 '언해본'이라고 합니다.

 

훈민정음 혜례본은 일제강점기를 피해 1940년에야 드러났고 해요. 혜례본에 있는 정인지가 쓴 서문에는 이 글자를 임금이 직접 만들었으며, 말은 있으나 글이 없어 불편한 백성들을 위해, 반나절이면 방법을 다 깨친다는 등의 설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이천이 여진 정벌의 상으로 세종에게 하사 받았고, 훗날 간송 전형필[각주:1]보관하여 현재 간송미술관에 있다고 합니다. 또 하나의 혜례본은 2008년에 발견되어 소송을 하고.. 기증을 하고... 뭐 그랬죠.. 한글은 훈민정음 혜례본에서도 들어났듯이 만든이와 목적, 만든 유래와 사용법, 원리 등이 있는 유일한 글자입니다. 곧 한글날이 다가오는데요. 한글날 만이라도 우리 글자를 더 이해하고 아끼는 마음을 가졌으면 해요.. 갈수록 한글의 가치가 높게 평가되고 있는 것 같아요~^^

 

간송미술문화재단 훈민정음 혜례본

 

 

한컴오피스의 한글은 훈민정음의 사라진 모음 아래아 모음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워드프로세서이죠.. 그래서 이름도 아래아 한글이라고 하고, 한컴의 설립일도 10월 9일, 해마다 10월 9일이면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한글날 행사를 하곤 하는데요. 들어보니 MS도 한글날에 행사를 한다고 해요. 왜하는지 모르겠는데... 아마 광화문 앞에 회사가 있기 때문인가..? 생각되지만, 그건 좀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아요..

  

이 밖에도 세종의 업적이라면 능력있는 인물의 발굴과 인물에 대한 믿음, 또 토론 정치 같은 것인것 같아요. 능력이 있다면 노비(장영실)라도 높이 사 쓰고, 김종서 이황 등 믿을 수 있는 사람은 평생을 곁에 두고 있었으며, 또 언제나 신선한 토론으로 자극주는 신진 선비들의 얘기를 귀기울여 들어주었던 것도 큰 업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전대왕의 무자비한 살상을 따뜻한 마음으로 안아 위로해 주었다고 생각해요. 참 존경 스럽죠..ㅎ

  1. 6.25 때 이 책 하나만 가지고 피란을 갔으며 잘때도 베게 밑에 넣고 잤다고 하죠..^^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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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loggerM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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